Rick17.07.21 13:02
"쉬운 의학용어가 결국 이기게 될 것입니다"
"의학용어의 한글화는 유치원 어린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대학교 해부학교실 정민석 교수는 의학용어가 쉬운 토박이말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치원 어린이도 듣자마자 이 낱말이 사람 몸의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머리뼈를 옛 용어로 두개골이라고 합니다. 두개골 정도는 워낙 많은 이들이 이 용어를 알고 있으니 바꾸지 않고 놔둬도 되지 않겠냐고 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치원 학생에게도 두개골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유치원 아이들도 자기 건강을 지켜야 합니다. 두개골이란 말 대신 머리뼈라는 말을 쓰면 아이들이 낱말을 외우는 대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치원 어린이 뿐 아니라 나이든 사람, 새터민, 우리 말을 공부하는 외국인, 학력이 낮은 사람 등을 위해서도 쉬운 토박이말이 많을수록 좋다고 정 교수는 강조했다.
다만, 염통이나 밥통 같은 낱말은 주로 짐승에게 사용해왔기 때문에 속된 느낌을 갖고 있어 심장, 위라는 말을 쓴다는 설명이다.
한자어, 토박이말, 외래어 중 가장 이해하기 쉽고 좋은 말들을 골라쓰되 토박이말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정민석 교수는 '만화 그리는 의사'로도 유명하다.
해랑 선생이나 튼튼 선생, 꽉 선생 등의 캐릭터를 등장시켜 해부학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는 의학용어의 한글화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만화를 그리면서 몸소 느꼈다.
만화를 그리면서 옛 용어를 쓰면 그 용어에 대한 설명은 따로 주석을 달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이해야 했지만 새 용어를 쓰면 따로 풀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의학용어에 근위, 원위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통 쪽에 가까우면 근위라고 하고 멀면 원위라고 하죠. 그런데 몸 쪽, 먼 쪽 이라고 쓰면 따로 풀이할 필요가 없으니까 만화가 간결해지고 쉬워집니다."
하지만 의학용어 한글화에는 많은 걸림돌이 있다.
특히 어려운 옛 용어를 배워온 의사들의 반대가 크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새 용어를 반대하는 사람은 의사 밖에 없습니다. 새 용어는 쉽습니다. 쉬운 새 용어를 쓰면 의사와 비의사의 차이가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의 기득권이 그만큼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에요. 차이가 줄어들면 의사도 편하게 진료를 할 수 있습니다. 환자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열 마디 해야할 것을 한두마디 하면 되는거에요. 환자도 좋고 의사도 좋은 일이죠."
옛 용어를 어렵게 배워온 의사들이 후학들에게도 어려운 용어를 배우라고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기득권이고 "못난 생각"이라고 정 교수는 비난했다.
본인은 어렵게 배워도 후배들은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선배 의사의 도리라고 그는 강조한다.
"용어가 아무리 쉬워져도 의학까지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학은 계속 어려워요. 의사의 기득권이 한글화로 인해 위협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새 용어, 특히 토박이말의 많은 사용은 격이 떨어진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그는 설명했다.
그는 옛날을 돌이켜보면 현재와 앞날을 알 수 있다며 세종대왕의 예를 들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 사대부들은 한글에 대해 '격이 떨어진다'고 비난했고 아녀자나 쓰는 말이라고 낮춰보며 자신들은 한자를 썼다.
정 교수가 어릴 때는 신문에 한자가 가득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적어도 고등학생이 돼야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전화번호부 역시 동명이인을 구분하기 위해 한자로 쓰여졌다. 당시 국민의 절반은 전화번호부를 읽지 못했다.
"격이 높은 한자를 쓰겠다고 많은 국민들을 문맹자로 만든다는게 말이 됩니까? 품격, 저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먼저인지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스포츠 신문을 제외하고 일간지 중에서 한글 전용신문을 시도한 곳은 한겨레신문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로보기, 한글화신문이었다.
조선일보를 포함한 모든 신문이 최근에 와서는 한자를 없애고 가로보기를 사용하고 있다.
"어려운 한자를 굳이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뜻이 통합니다. 영어의 기원이 그리스어, 라틴어인데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몰라도 영어를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잇습니다. 영문학자는 그것을 배워야 할 지 몰라도 보통 사람은 몰라도 됩니다. 한문학이나 한의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한자를 공부해야 하지만 일반인은 한자를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정 교수는 그 자신 역시 80학번이고 입시에서도 한자가 아주 중요해서 한자공부를 어렵게 했어야 했다고 떠올린다.
하지만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은 더이상 한자를 배우지 않기를 바란다고 힘주어 말했다.
◆"쉬운 말이 결국에는 이긴다"
정 교수는 지금 대한해부학회 용어심의위원회 간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 의학용어집은 두 가지가 나와있는데 대한의사협회에서 펴낸 '의학용어집'과 대한해부학회에서 펴낸 '해부학용어집'이 있다.
둘은 물론 서로 협조하고 있지만 지금 가는 길은 방향이 서로 다르다.
의학용어집은 옛 용어로 돌아가는 추세다.
현재는 두개골과 머리뼈를 동격으로 처리하고 있지만 새로 나온 용어집에서는 두개골을 앞에다가 쓰고 머리뼈라는 낱말은 작은 글씨로 처리했다.
"일종의 파워게임인데 힘있는 사람들이 전산화 된 의무기록에서 머리뼈라는 말을 빼고, 보험공단에서도 이 말을 빼고 있어요."
정 교수는 이같은 의사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마치 독립운동 하는 기분이라고 토로했다.
"지금은 힘의 논리에서 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질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끝내 이깁니다. 한자가 수백년동안 한글을 짓눌렀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세대가 바뀌면 언젠가는 새 용어가 이깁니다. 우리는 현재가 아닌 앞날을 위해 새 용어를 계속 다듬고 있습니다."
또 그가 그리는 의학만화와 과학만화 등을 통해서도 새 용어를 널리 알리려고 애쓰고 있다.
"제가 한글화에 관심을 갖고 애써온지 25년이 됐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연세의대 정인혁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해부학자들이 그 일을 해왔습니다. 그 분들의 영향을 받아 제가 한글화를 주장할 수 있는 내공이 생긴겁니다."
정 교수는 '공정한 경쟁'을 바란다고 강조했다.
"의사협회에서 칼자루를 쥔 분들은 옛 용어 사용을 밀어주고 있습니다. 옛용어도 논리가 있어요. 장점도 있고. 그런데 본인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새 용어를 죽이면 곤란하다고 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옛용어와 새용어를 동등하게 놓는겁니다."
머리뼈와 두개골이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후손과 앞날을 위해 혼란기를 거칠 필요가 있다는 게 정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의사국가고시에서 옛 용어와 새 용어를 동시에 써주는게 좋다고 강조했다.
둘 중 학생들이 배우기 좋은 말로 배우면 된다는 입장이다.
"똑똑한 교수들이 옛 용어나 새 용어 중 알맞은 것을 골라서 가르칠 겁니다. 의무기록이라든지 보험공단 용어에서 옛 용어와 새 용어를 동시에 써주기 바랍니다. 컴퓨터 작업이라서 어렵지 않습니다. 의사가 머리뼈를 써도 컴퓨터가 인식하고 두개골을 써도 인식하는 거거든요. 동등하게 놔주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의학 교과서를 쓰는 사람도 어떤 말에 비중을 두고 주로 쓸 것인지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좋은 말 위주로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어느 한쪽이 이기는게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멀리 내다봤으면 좋겠어요. 지금 우리는 한글을 반대한 사람들을 욕하잖아요. 한글창제반대 상소문을 냈던 최만리는 현대에 와서 얼마나 욕을 먹고 있습니까?"
정 교수는 '쉬운 것이 좋은 것, 쉬운 말이 좋은 말'이라고 압축했다.
특히 전문가는 어려운 전문지식을 쉽게 풀이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일은 다른 전문가, 학생, 일반인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말을 풀이할 만큼의 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거나 전문가로서의 책임감이나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간단합니다. 쉬운 말이 좋은 말입니다."
정민석 교수
아주대학교 해부학교실
http://e-healthnews.medigate.net/medigate/webboard/detail.php?board_id=person&hit=Y&content_uid=17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