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쿠카으랏차2018.04.04 15:34
개춘문예 지원작
57호 전역모
드디어 전역... 전역전 군장점으로 전역모를 사러 간다. 그동안 행보관한테 욕먹어가며 기른, 크게 기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왠지모를 말년병장의 일탈과 '남들이 다 하니까' 정도의 가볍지만, 그래도 소중한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정도면 사회인이지 여기에 맞춰서 사야겠다'라고 되네이며 개구리가 박힌 57호 전투모를 썻다 벗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어느 위장패턴이 이쁘고 색배합이 잘빠졌는지, 개구리 오버로크가 금빛으로 두툼하게 잘 박혔는지, 부대 내에선 무뚝뚝함의 대명사인 그였지만 마치 다이어리를 고르는 여고생 처럼 이리저리 세세하게 따져고른다. 군장점 아저씨의 나중 생각해서 2~3치수 큰 거로 사라는 조언을 '머리통이 자라는 것도 아닌데 무슨...'이라고 무시한 채로 이것저것 따져고른 57호 전역모를 구입했다. 머리속엔 전역 후 자신의 멋진 모습을 상상하며.
다음해
복학생인 그는 학생예비군에 편성되어 비교적 간단한 예비군 훈련을 받는다. 전투복과 전투화를 챙기기 위해 자취방을 떠나 오랜만에 고향집에 내려가 짐을 챙겨놓고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남자끼리 모이면 나오는 자연스런 군대이야기. 전역한지 얼마 되지않아 짬내가 덜빠진 그들이기에 군대얘기가 계속되었다.
혹한기훈련 얘기, 고무신 거꾸로 신은 첫사랑 그×얘기, 관심병사가 부사관 멱살잡은 얘기, 빅팜의 우수성과 그 활용범위의 다양성에 대한 토론이자 찬양...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세 우습게도 아니, 자연스럽게도 군시절 당했던 부조리나 억울함 등으로 주제가 바뀌었다. "임마 나는 맞선임 그 ×발놈 하... 아직도 빡친다... 갑자기 어디서 약을 쳐먹고 왔는지 지가 경례 받아주지도 않았는데 건방지게 손 내렸다며 거울 앞으로 끌고가서 '쟤가 먼저 내릴때까지 경례하고 있어라'라길래 1시간동안 거울앞에서 서있었거든? 팔도 떨어질거 같고 자존심도 상하고 존나 울고싶더라. 근데 진짜 ×같은게 뭔지 아냐? 당직부사관 새끼가 화장실 쓰러 들어와서 한번 슥 쳐다보더니 존나 쪼개고 가더라 ×발놈들..." 잠시 분위가 어두워 졌지만 해병대 수색대를 나온 친구가 "탈락"이라며 너스레를 떨자 웃음이 터졌다.
그러던 중 "야 해병 수색은 뭐없냐?"라는 물음에 너스레를 떨던 친구의 얼굴에 순간 무표정이 스쳐간다. 아니, 내가 잘 못 본것일테다 항상 밝은 친구였으니. 이 친구, 상수네 가족은 좀 특이하다.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본인까지 3대가 해병대 수색대이고, 심지어 할아버지는 16기 참전용사이시다. 부랄친구인 그는 어릴 때 부터 군대얘기만 나오면 '남자는 해병수색이지 난 무조건 갈꺼다 라이라이차차차 '라고 좀 정신나간(?) 놈처럼 말할 정도로 그에게 있어 해병대는 아마 인생의 커다란 의미일 것이다.
잠시의 정적, 하지만 취기 때문인지 장난스럽게 또 다시 물어온다 "야 해병대 별거 없네 나도 가서 허세좀 떨고다닐껄" 순간 모두 상수의 해병대에 대한 자부심을 알기에 안색을 살폈지만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해왔다. "군생활 다 힘들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들 웃음이 터졌다. 분위기에 휩쓸려 멋진척 하지말라고 핀잔을 주려는 순간, "근데 난 예비군 가기 무섭다. 대학이라도 들어갈껄... 동원예비군 가도 기수따져가며 장기자랑 시키고 심부름 시키고... 내가 군생활 x발 다 참고 견뎠거든? 박병장 그 개x끼가 같이 근무나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서 매미 잡아와서 먹으라더라? 농담인줄 알고 웃었는데 하이바로 존나게 맞았다. 매미? 먹었지. 맞는것도 맞는거였는데 말 안들으면 기수열외 당해서 사람취급도 못받으니까. 하.. 아직도 여름되면 그 어금니 사이로 전해오는 소름끼치는 바스러짐, 죽기전에 나는 찢어지는 비명소리... 씹을때마다 찌익 거리는 그 소리... 전역만 보고 ㅈ같아도 견뎠는데... 예비군까지 씨x 놈들이..." 상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슬프게 보이는, 아니 겁에 질려 보이는 상수의 얼굴은 20년간 한번도 본적 없는, 상수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였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걸까... 순간 인터넷에서 보았던 짤방이 생각났다 '노예가 노예로써의 삶에 익숙해지면 누가 무거운 족쇄를 가지고 있는지 빛나는 사슬을 가지고 있는지 자랑을 한다'.
다음날 새벽, 뒤집어지는 속을 컵라면으로 달래고 버스에 올랐다. 어제 상수는 그 이후로 텐션이 폭발해서 해병대 수색출신 다운(?) 주량을 보여주었다. 오늘도 출근이라던데 아직 일어났다는 답장은 없다. 하지만 성실한 녀석이니 잘 일어날테지.
당장 다음주가 중간고사인데 어쩌다 들어온 여초학과라서인지 수업은 정상적으로 진행한다고 문자가 왔다. 후배들이랑 좀 친해 놓을껄... 사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직 남은 술기운 때문인지, 다른집 아들은 군대 월급 모아와서 지가 등록금도 내고 생활비도 쓴다는 어머니의 핀잔 때문에 도망치듯 나와서 인지 아무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아니면 2년을 함께했던 전투복이 가져다주는 익숙함 때문이려나.
예비군 훈련장 게이트 앞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비록 훈련비 16000원은 차비와 담배 한갑에 사라진지 오래지만 훈련장앞 포장마차에서 토스트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의 배를 놀리며 게이트를 향해 간다.
'선배님들 전투모 똑바로 쓰십니다! 상의 바지에 넣으십니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나는 조교를 보며 '쟤도 참 열심이다' 라고 혼잣말을 하며 손에 들고있는 전역모를 썻다. 나의 군생활의 유일한 증거인 57호 전역모... 순간 왠지모를 억울함과 후회, 짜증, 갑갑함 이 모든 감정이 한군데 뒤엉켜 솓구쳐 올라 나도 모르게 가슴 저 안쪽부터 뜨거운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아 씨× 존나게 작네 군장점 아저씨 말 들을껄 아오 빡처 시부럴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