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되는 닉넴19.02.12 18:40
개드립은 댓글 링크의 활성이 안되어 윗 링크의 원문 첨부합니다.
[젊은 지성 최요셉님 글 펌]
여러 각도에서 역사를 공부해보니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반일정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부분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어떤 목적을 위해 이용되어 왔으며 이제는 국익에 크게 해가 된다고 느껴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번 BTS 원폭티셔츠로 언론과 여러 커뮤에서 극명히 이슈화되기도 했습니다. 여러 반일주제에 대해 하나씩 페친님들과 확인해 보고싶어 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1.일본정부는 한번도 사과를 한적이 없는가?
일본정부의 광복후 대한민국에 사과한 리스트입니다.
1965년 6월 22일: 외무부 장관 시나 에쓰사부로
1982년 8월 24일: 국무총리 스즈키 젠코:
1982년 8월 26일: 관방 장관 미야자와 기이치
1984년 11월 6일: 히로히토 천황
1984년 11월 7일: 국무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
1989년: 국무총리 타케시타 노보루
1990년 4월 18일: 외무부 장관 나카야마 다로가
1990년 5월 24일: 하키히토 천황이
1990년 5월 25일: 국무총리 가이후 도시키
1992년 1월 1일: 국무총리 미야자와 기이치
1992년 6월 6일: 관방 장관 가토 고이치
1993 8월 4일: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
1993년 8월 11일: 국무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
1993년 8월 23일: 국무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
1993년 11월 24일: 국무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
1994년 8월 31일: 국무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연설에서
1995년 7월: 국무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
1995년 8월 15일: 국무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
1996년 6월 23일: 국무총리 하시모토 류타로
1996년 10월 8일: 아키히토 천황
1998년 10월 8일: 국무총리 오부치 게이조
2001년 4월 3일: 관방 장관 후쿠다 야스오
2001년 11월 8일: 외무부 장관 다나카 마키코
2001년 10월 15일: 국무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2002년 9월 17일:국무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2003년 8월 15일: 국무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2005년 4월 22일: 국무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2005년 8월 15일: 국무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2010년 2월 11일: 외무장관 오카다 가쓰야
2010년 8월 10일: 국무총리 간 나오토
2010년 12월 7일: 국무총리 간 나오토
2015년 8월 14일 아베 담화
2. 일본 정부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없었는가? 많은 사과문중 비교적 최근건만 몇가지만 옮겨봅니다. '진정성'이란 것은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인 만큼 원문을 올리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1984년 11월 6일: 히로히토 천황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오늘날 이 기간 동안 우리 사이의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그리고 난 이것이 다시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전두환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1995년 7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성명“이른바 군 위안부에 대한 문제는 당시의 일본군과 관련된, 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을 심각하게 더럽힌 하나의 흉터입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변명할 수 없습니다. 난 군 위안부로서,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감정적, 육체적 부상을 겪은 사람들에게 깊은 사죄를 표합니다.” ("아시아 여성 기금" 당시 국무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의 성명).
2001년 11월 8일: 외무부 장관 다나카 마키코가 연설에서: “우리는 지난 전쟁 동안 일본이 많은 나라의 국민들에게 큰 피해와 고통을 일으킨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가 그들의 소중한 생활을 잃었고 부상당했습니다. 전쟁은 이전 전쟁 포로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치료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겸손한 정신으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대면하면서, 난 오늘 1995년 무라야마의 성명에서 표현된 우리의 깊은 참회와 가슴 속 깊은 사죄를 재확인합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체결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외무부 장관 마키코 타나카의 연설) .
2015년 8월 14일 아베 담화
전쟁터의 뒤안에는 명예와 존엄이 크게 손상된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가늠할 수 없는 손해와 고통을 우리나라가 안겨 준 사실. 역사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가혹한 것입니다. 한 분 한 분에게 저마다의 인생이 있고, 꿈이 있으며,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깊이 되새길 때, 지금도 여전히 말을 잃고 그저 애끓는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일본은 지난 대전에서의 행동에 대해 거듭 통절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명해왔습니다. 그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 대만, 한국, 중국 등 이웃사람인 아시아인들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며 전후 일관되게 그 평화와 번영을 위해 힘을 다해 왔습니다.
이러한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가족을 잃으신 분들의 슬픔, 전화(戰禍)로 도탄의 고통을 겪으신 분들의 아픈 기억은 앞으로도 결코 치유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20세기 전시 하에 수많은 여성들의 존엄과 명예가 크게 손상된 과거를 우리 가슴에 계속 새기겠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일본은 이런 여성들의 마음에 늘 다가가는 나라가 되려고 합니다. 21세기야말로 여성의 인권이 손상되는 일이 없는 세기로 만들기 위해 세계를 리드해 가겠습니다.
->일부 지자체장이나 어느 단체에서 불편한 발언을 하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보다는 '망언'이라는 단어로 간단히 정리하고 일본 총리나 천황이 공식적으로 한 사과도 무효화하는 경향이 우리 언론에게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이 없었는가?
ㄱ. 65년 한일 청구권으로 일본의 당시 외환보유액의 절반 가까이를 배상받았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피해자 개별보상을 원했으나 한국정부가 통합수령하고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국가기간시설 건설에 종자돈으로 사용된 것은 잘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70년대부터 최근에 노무현정부 시기에도 보상신청자에 대해 보상금 지급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협정으로 한국에 남아았던 일본인 개인 재산의 재산권도 포기되었습니다.
ㄴ. 위안부는 광복후 위안부여성들이 지속적으로 시위하고 배상요구가 있었던 부분이 아닙니다. 사실 90년대 이전에는 사회적 이슈가 없다가 이화여대 교수의 칼럼으로 사회이슈가 되었고 90년대 노태우 정부가 거꾸로 실태조사해서 구체적인 사례가 나온 것이고 정부조사로 나온 200여명에 대해 조사후 일본정부(일부 일본국민성금 포함)의 아시아 여성기금형태로 보상하였으나 정대협이 중간에 이를 막아서 절반 정도 인원의 할머니들만 수령하였고 한국정부가 모금한 기금은 할머니들에게 전달이 안되었습니다.
ㄷ.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일본에 과거사문제에 대해 더 이상 제기하지 않겠다고 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추구한다고 하였고 노무현은 본인이 직접 일본 방송에 간담회형태로 여러번 이를 표하였습니다.
ㄹ. 그러나 우파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대협 주도로 정부비판과 위안부문제를 이슈화하였고 이명박 정부 시기부터 위안부시위를 시작하다가 박근혜 정부 시기 절정을 이루고 과격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박근혜대통령이 일본 아베총리의 사과를 받아내고 기금형태로 다시 배상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요구하고 정치화하였던 일본정부의 재사과와 재배상이 막상 이루어지려고 하니 더 이상 정치적 소재, 정부공격과 정대협 존재 이유에 문제가 되니, 좌파친중정치세력과 정대협의 강력한 반발로 피해자들에 대한 기금의 실제 집행은 안되었습니다.
ㅁ. 박근혜 정부에서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받은 것에 대해 부실하다는 비난을 좌파정당과 정대협에서 하였을 때 왜 우파정당은 좌파정부집권기에는 일절 사과와 배상요구나 관철이 없었는지, 또 정대협등 단체에서 구체적인 사과나 실질적인 배상에 대한 의견을 정부에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제시한 적은 있는지, 그리고 정대협이 위안부들에 대한 전체 대표성이 있는지 야무지고 분명히 따지지않은 것이 실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파정당의 이런 시류에 쉽게 편승하고 비겁한 태도가 국익에 해가 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4. 좌파정권시기 없었던 소녀상 설치가 우파정권 시기 시작된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ㄱ. 일단 설치의 주체가 대한민국 정부가 아닙니다. 정대협을 비롯한 일부 단체들입니다.
ㄴ. 국제협약상 문제가 있습니다.
비엔나 협약 제22조는 "각국 정부는 외국 공관의 안녕을 방해하거나 품위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특별한 책무가 있다"
ㄷ. 도로교통법의 위반이기도 합니다.
ㄹ. 관리상의 문제도 있습니다. 추도상징이 노천에 있음으로써 비둘기배설물을 뒤집어쓰고 있으므로 적절한 추도시설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템의 상징화가 된다는 점에서도 반대합니다.
5. 소녀상 설치 및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단체의 이념편향성도 문제입니다. 이는 좌파정권기와 우파정권기에 활동성향 차이로 나타납니다.
2011년 12월 정대협, ‘김 국방위원장 서거라는 급작스러운 비보에 북녘 동포들에게 깊은 애도를 전한다’는 조전(弔電) 북측 전달
윤미향 상임대표의 남편, 1994년 남매 간첩단 사건으로 징역 4년을 선고 받은 김삼석 씨
손미희 대외협력위원장 남편 한충목 씨, 맥아더 동상 철거집회 등 각종 反美투쟁 주도하다 실형
손미희 대외협력위원장은 40여 차례 訪北, 통진당 해산 결정 반대 시위, 김정일 조문 주장
정대협 간부들 중 일부는 정권 퇴진, “박근혜 여성대통령 자격 없다”는 대국민 호소문 발표 등 시국활동에 적극 참여.
위안부단체의 사드 반대 시위 및 반미 시위 참가.
6. 같은 위안부 단체이지만 보상금을 수령한 무궁화할머니회에 대한 정대협의 공격행위로 위안부 단체가 둘로 갈라진 사태에 대해 정대협의 순수성은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1997년 일본 정부가 민간의 성금을 모아 마련한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통장 계좌를 수시로 확인하고 전화로 공갈 협박을 한 부분,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돈 몇 푼에 민족적 자존심을 팔아먹은 화냥년"이라는 표현'으로 비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언론에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초기 정대협에서 활동했던 한 여성 활동가는 '정대협이 1997년 '아시아여성기금'이 시행되자 자신들이 할 일이 없어진다고 탄식하더라며, 과연 정대협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하는 단체가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표시하기도 하였다'.는데 지금 그동안 위안부들을 지원하였던 일본의 시민사회가 등을 돌리고 이런 번복이 결국 혐한조류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7. 이러한 반일 프레임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시키고 마치 북한이 항일투쟁에 의해 건국되어 정통성이 있다는 것으로 좌파세력에 의해 여러 프로파간다를 통해 선전선동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정부 수립시 친일파의 실체도 알아야 합니다.
북괴 김일성 정권의 친일파 출신 주요인사
김영주 북한 부주석, 당시 서열2위, 김일성 동생 (일제강점기 헌병보조원)
장헌근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
강양욱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일제시대 도의원)
정국은 북한 문화선정성 부부상 (아시히신문 서울지국 기자)
김정제 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강점기 양주군수)
조일명 북한 문화선정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 북한 부수상 (일제강점기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활 북한 초대 공군사령관 (일제강점기 육군 항공대 소속)
허민국 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강점기 육군 항공대 소속)
강치우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강점기 육군 항공대 소속)
최승희 일제하 친일단체 예술인 총연맹 회원
김달삼 조선노동당 제주 4.3 사건 주동자 (일본군 소위)
박팔양 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일제 만선일보 편집부장)
한낙규 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강점기 검찰총장)
정준택 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강점기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오장 근무)
한희진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강점기 함흥철도 국장)
이승엽 남로당 서열 2위, 월북후 빨치산 유격투쟁 지도 (일제 강점기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체신상 북한 소련대사 (일제 강점기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연단' 상임간사)
8.야스쿠니 신사참배는 어떻게 볼 것인가..
야스쿠니 신사는 위령종교시설입니다. 신토사상에 바탕하여 19세기부터 존재하였습니다. 미국이나 우리와 같은 국립묘지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래서 조선인이나 대만인의 이름도 올라가 있습니다. 한번 이름을 올리면 분리할 수 없다는 일본 신도의 특수성이 있어서 일본정부도 5번이나 법인화하여 통재하려 했지만 안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패전후 일본 자민당도 전몰자 위령의식할 때 정교분리를 위해 법을 만들려 하였는데 유족회와 신토단체가 반대하여서 지금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종교와 사상이 다른 부분은 거기에 맞게 전몰장병 국립묘지나 위령시설을 국가가 적절한 방식으로 운영하란 식으로 우리정부가 일본정부에 주장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또 우리 정부도 계속 그걸 요구하여 왔습니다. 이 부분은 일본정부에서 피해국에 충분한 설명과 대안을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협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 외교의 불균형적 접근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ㄱ.연평도 포격,천안함 격침,당포함 격침, 대한한공 공중폭파, 김포공항테러, 울진삼척 공격, 수많은 휴전선 기습공격에 의한 한미 장병 희생등에 대해 북한 김정은에게 적절한 사과를 요구하고 배상을 청구하였는지.
ㄴ. 러시아로부터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을 집단 처형/학살한 죄 그리고 학살 생존자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여 죽이거나 학대한 죄 , 대한항공 공중격추에 대해 러시아정부와 푸틴대통령에게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였는지.
ㄷ. 중국정부/시진핑로부터 한국전쟁 불법개입, 그리고 미세먼지, 한국기업에 대한 불공정 사례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였는지 이제는 다시금 돌아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현정부는 시진핑이 무서워서 이를 요구 못하는건 아닌지요? 단한번도 근세이후 해외로 진출하지 못하고 자국민을 노예로 삼아 망해서 존재하지도 않은 명나라황제 제사지내며 비굴한 사대하며 유지된 이씨조선 수준의 외교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10 결언 : 2차 대전 종전후 수많은 국가가 독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과 일본과 같은 관계는 유일합니다. 제가 학창 시절을 보낸 90년대와 2000년대 초만해도 극일이 주류였지 반일이 주류는 아니었습니다. 정치,경제,사회 어떠한 시각에서 본다고 하여도 일본은 미국과 함께 대한민국의 동맹이고 우방입니다.
김대중정부 시절 일본대중문화개방을 경험한 세대로써 지금 언론에서 사용중인 자극적인 반일유도가 결국 세대가 몇번은 바뀌었을 시간이 흐른 광복 73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분노와 원한을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확대 재상산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한일관계의 이간질을 통한 한미일 동맹 붕괴, 친중사대주의의 고착화와 전제봉건노예제 국가인 김씨조선왕조를 추종하는 정치세력의 유지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석광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