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시리디 시린 한파속에서 인부들이 드럼통에 의존에 몸을 녹이고 있다. "어이 김씨 왔는가?" 하나같이 헤진 옷을 입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 이따금씩 젊은이들이 오긴 하지만 작심 삼일이라 했던가 아님 일이 그만큼 고되서 그럴까 하나같이 다들 삼일을 못버티고 결국엔 이렇게 다섯만이 남는다.  "어이 박씨 이번에 첫째 고등학교 입학했다며! 축하하네 그려"
박씨는 멋적은지 머리만 벅벅 긁어댔지만 동료들의 축하가 내심 싫지많은 않은 눈치다. 눈보라는 거세져 갔지만 드럼통 하나에 몸을 녹이며 가족들을 위해 일을 기다리는 그들의  따듯한 마음은 식을줄을 모른다.

찬바람을 헤치며 나타난 한 남자가 품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드럼통에 집어넣는다.뜨거운 불속에서 빠르게 오그라들며 불타오르는 봉투와 남자의 표정을 보아하니 예사롭지 않은 물건인듯하다.
"총각. 그게 대체 뭐시여. 넣고 허실허실 웃는거 보니께 뭐 있수?"
비록 쓴웃음이였지만 주머니에서 담배하나 꺼내물고 진한 연기를 한숨처럼 뱉어내고는 고백하듯이 말했다.
"제.. 유서입니다.."
그에게는 겨울 찬바람보다 더욱 시린 상처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때는 작년 여름이었다. 인수합병이다 구조 조정이다, 온갖 소문들로 한동안 회사가 떠들썩 했었던 적이 있었다. 출근하여 회사에 도착하면 한 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싸하게 식어버린 분위기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아침 뉴스에서 보았던 폭염주의보가 무색해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나 또한 그런 소문들 앞에서 마냥 태연해질 수는 없었기에 하나같이 표정이 굳은 동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날도 아내의 따뜻한 아침밥을 먹고 마음속의 불안감은 애써 외면하곤 힘겹게 출근길에 올라 늘 타왔던 회사 엘리베이터에 도착한 순간, 나는 무언가 평소와 다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신 부장님, 공고 보셨어요?"
"봤네. 역시 사무직부터 쳐내는 구만"
쿵ㅡ
회사 사람들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은듯했다. 손발이 싸해지고 심장이 뛰었다. 아닐 것이다. 그래 그래도 과장인 내가 정리해고되진 않겠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되뇌곤 떨리는 손으로 우리 부서 문을 열었다.
아. 누가 그랬는가? 
불길한 예감은 늘 맞다고.. 각종 서류들로 어지럽혀진 내 책상이 있던 자리는 어느새 차가운 회사 돌바닥만이 남아있었다. 그 길로 밖에서 아무렇게나 시간을 때우곤 집으로 돌아와 잠들어 있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그래도 둘째를 놓으려다 아직은 이르다 싶어 놓지 않고 첫째만 놓은 게 한편으론 잘한 일이라 속으로 생각했다.
방으로 발걸음을 옮긴 뒤 문을 닫곤 서랍장을 열어 봉투를 하나 꺼내들었다. 정말 이 봉투를  꺼내는 날이 왔다니.. 그 봉투를 꺼내자마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유서였다. 몇 달 전 미리 써놓은 유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유서를 꺼내리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혹시나, 정말로 만에 하나 구조조정으로 실직이 될 때에 충동적으로 목숨을 끊을까 봐 100만 분의 1의 경우를 생각하여 미리 써둔, 그런 유서였다. 그리고 지금 그 100만 분의 1의 경우가 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생각이 들어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봉투를 여는 순간, 유서가 아닌 다른 작은 엽서 하나가 툭ㅡ 떨어졌다.
[여보, 나에요. 
우연히 방 정리를 하다 무슨 서류인가 싶어 보게 되었어요.
여보, 늘 아침마다 힘들지 않은 척 괴롭지 않은 척 그렇게 웃으며 저와 식탁에서 마주하느라 많이 곤혹스러우셨죠?
저도 알고 있었어요. 연애 시절부터 워낙 속마음은 숨길 수 없는 사람인지라 당신이 무슨일이 있는걸 알면서도 언젠간 내게 말해주겠지 싶어 기다렸던 게 이 봉투를 통해 그 내용을 알게 되었네요. 미안해요. 
혼자 끙끙 앓게 해서, 그렇게 눈치도 없는 척 미리 물어봐주지 못 해서, 그리고 설령 당신이 실직되더라도 나는 늘 당신 곁에 있겠다는 그런 믿음을 주지 못해서, 그래서 미안해요 여보. 당신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다음 날 아침은 따뜻한 아침밥만이 아니라 따뜻한 말로 당신을 감싸 안아줄게요. 여보, 사랑해요. 부디 나와 은영이의 곁에서 오랫동안 행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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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네 아내 덕분에 죽지 않고 오늘 여기서 이 늙은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구먼?"
"네.. 뭐 그런 셈이죠. 참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생각해요"
"원래 사람은 다 그런 게지. 누구라도 힘이 들면 극단적인 생각을 해바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게야.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나?"
"맞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날씨 한번 참 따뜻하네요"
"그게 무슨 소린가? 이 엄동설한에 내 손발이 얼어붙겠기에 이렇게 드럼통에 불을 지폈구먼 날씨가 따뜻하다니? 자네가 그리 말하니 거 참 황당하구먼"
"하하. 그러게요. 작년 여름은 겨울 찬바람보다 더욱 시린 것 같더니 올해 겨울은 봄바람처럼 따뜻하기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