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때도 있었고 짧았을 때도 있었던 적지 않은 연애 횟수 동안 헤어짐을 내가 말하기도 듣기도 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비롯한 나의 상대들은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며 최대한 상대가 납득이 가게끔 이별을 인지시키고는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서로의 옆에 가장 가까이 함께 하던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이자 마지막 예의였으니까.
이렇게 최대한 깔끔하게 수습되고 마무리되는 이별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았고, 훗날 서로가 서로에게 힘들 후회라든지 후폭풍 같은 것이 생겨나지 않게 됐다.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본 카톡 이별 통보에 환승 이별.
이거 진짜 사람 지옥 불구덩이로 던져 넣는 기분이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기분.
사람이 사랑 앞에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스스로가 통제가 안 되는 상황.
환승이니 바람이니 하는 것들이 저 기성 부부들이 줄곧 저지르는 불륜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결혼이라는 제도의 강제성 유무를 제외하고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감정은 그 크고 작음을 따질 수 없는 같은 본질의 것이 아닌가.
이 이해할 수 없는 국가는 개인의 사생활과 감정의 자유를 운운하며 간통죄조차 폐지시켜 버렸다.
살인이 상대방의 육신을 죽이는 행위라면, 환승, 바람, 불륜 따위의 배신은 상대방의 마음을 죽이는 행위다.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을진대, 감정이 죽어져 이별 앞에 흐느끼는 우리네 수많은 아픔들은 누가 감당하고 책임진다는 말인가.
연인에게 배신당해 칼부림을 일으켰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심지가 굳지 못해서', '의지가 박약해서'라며 비난했던 나다.
이미 나는 내 머릿속에서 상대방을 수백 번, 수천 번 죽였다. 뉴스의 그 사람은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고 나는 옮기지 못했을 뿐. 나는 이제 뉴스의 그 사람을 백 번 이해한다.
인과응보는 존재한다. 내 지인 중에는 환승을 했다가, 환승을 당했고, 또 그 환승을 한 상대가 역으로 환승을 당하는 코미디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정말 '저기 하늘 위 어딘가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나 보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정말 마음을 곱게 쓰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다리지 말자. 미련 두지 말자.
행여나 나를 그렇게 무참히, 갈가리 찢어내고 도망가듯 떠난 상대가 내게 울고불고 후회하며 돌아온다 하더라도 이제는 나는 그를 다시 받아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인 사이에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라는 말은 가벼운 감정싸움이나 서로에 대한 사랑의 확인 정도에만 어울리는 말일뿐, 설렘을 찾아 상대를 배신하고 도망간 사람에겐 대입할 수가 없는 말이다.
성별, 연령, 인종, 국가를 떠나 인간관계의 기본은 신뢰가 토대이기에 나를 배신한 상대에게 다시 또 내 옆구리를 내어줄 수는 없는 법이다. 만약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반복될 의심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줄 것이 자명하다.
자기최면이 필요하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 자존감을 높이자. 내 가치에 투자하자. 언젠가 길에서 우연히 그 상대를 마주쳤을 때 외적, 내적으로 가치가 상승한 내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을 버렸는지 땅을 치며 후회할 순간이 올 수 있도록. 그 순간이 얼마나 통쾌할지 상상하며 당분간은 복수심을 내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에너지로 삼자.
그러다 보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뒤에 지난 지옥 같은 시간과 그리도 밉고 그리웠던 그 사람이 정말 아무런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올테니.
당장 마음이 시리고 외롭다고 내 마음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 섣불리 새로운 이성을 만나지 말자. 새로운 이성을 만나는 내내 머릿속에서 그 이전 사람의 얼굴이 자꾸만 수면 위로 떠오르는, 새로운 이성의 얼굴에서 문득 그 이전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지옥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내가 나에게 주는 또 하나의 아픔이자 그 새로운 이성에게도 크나큰 실례가 되는 것이다. 내가 힘들고 아프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이다.
하지만 만약 나의 상처를 솔직히 털어놓고도 그 새로운 이성이 나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각오가,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제서야 조심스레 기대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환승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심리적 방어기제에서 오는 것이다. 이별 후에 따르는 아픔과 미련, 후회 등의 부정적 감정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것을 느낄 틈도 없이 다른 사람을 찾아 도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당장 살기 위해 급하게 도피처로 선택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탐색할 시간적, 감정적 여유가 있었겠는가. 어떤 일에든 예외는 존재하지만 경향은 존재하는 바, 환승을 통해 만난 이성에게 안착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환승을 당한 사람들은 조금만 바꿔서 생각해보자. 사랑의 시작이 둘이었으면 사랑의 끝도 둘이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별에 따르는 감정의 짐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나에게 던져버리고 도망간 무책임한 겁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본인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 이자가 붙으면서 암세포처럼 가슴속 어딘가에서 커져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 시한폭탄처럼 터져버리는 순간, 내게 돌아온다 해도 나는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때쯤에는 나는 나의 몫의 이별의 짐을 정리한 후일 테니까.
분명히 기억하자. 내가 그리운 것은 지금의 그 사람이 아니다. 내 옆에서 나를 사랑하던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던 내 모습이다. 그리고 그 행복했던 시간이다.
분명히 기억하자. 내 옆에서 나를 사랑하던 그 사람은 죽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던 나는 죽었다. 그리고 그 행복했던 시간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