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여자대학교와 여성인권의 모순

334480No.512312024.11.17 01:13

여성인권 신장의 정당성은 남성에 의한 모진 여성 박해로부터 마련되었다.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가 그러했다. 여성에게 초등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주지 않던 사회상은, 개인 여성으로 하여금 그 또한 당연하고 조용하게 감내할 것을 주문했다. 이 땅에 배우지 못한 서러움을 갖고 살아가는 여성은 아직까지 그 울분을 당신 가슴속에 삭히고 계신다.

유구하게 존귀했던 남성과 비천하디 비천했던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는 슬프게도 같을 수 없었다. 남성은 더 배웠어야 했고 여성은 덜 배웠어야 했다면, 그나마 좋았으련만. 여성은 교육대상에서부터 배제되었다. 이에, 마치 세종대왕의 정신과 같이, 여성의 목마른 배움을 어엿비 여기는 키다리아저씨들이 출현했다.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는 이화학당의 설립으로 여성에게 온기가 닿기 시작했다. 그 뒤로 잇따른 여학교들의 설립이 이어졌는데, 이들은 현대의 여성교육기관의 전신이 되었다. 서구권에서의 페미니즘 연구 그리고 성차별 금지의 헌법 유보를 거쳐, 대한민국 여성은 이제서야 약자의 지위에서, 보다 적극적인 보호를 받게 됐다.

우리는 태어나는 것으로 삶을 시작하는데,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된 성별로 불합리한 차별을 받아서 되겠는가? 이러한 합리적인 의심에서부터 출발하여 우리 사회의 모순과 차별을 없애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불합리한 차별에 대하여 기꺼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권리를 지켜내는 것이고 사회구성원으로서 당연한 책무이기도 하다.

문제는 여성인권 신장의 정당성이 어찌하여서인지 남성 혐오의 불씨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남성을 혐오해야 한다는 것인지. 혹은 남성을 혐오할수록 여성의 인권 보호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본인은 무소불위의 일등시민이 되고, 누구는 영문도 모르고 꼴등시민이 된 채로 일등시민에게 비방당한다. 권리행사의 주체로서는 그들끼리 연대하여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호기롭게 행동하지만, 의무이행 당사자로서는 전략적 침묵을 선택하여 입을 다문다.

키다리 아저씨가 선물해준 학습 기회의 개방 정신은 어찌 된 영문인지 온데간데없이 소멸하였다. 굳게 잠겨 폐쇄된 문틈으로는 혐오를 배설하였고, 그 혐오는 또 다른 성벽이 되어 다시는 개방하지 못하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자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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