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할머니

927125No.213762019.08.28 12:19

작년 추석, 결혼 전 찾아간 아내의 외할머니 집에서 추석에 빨갛게 동그라미 쳐진 달력을 보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초등학교로 졸업한 내가 초등학생 때 이야기이다.

할머니는 93년도에 할아버지를 보내시고 줄곧 혼자 사셨다. 그런 할머니가 안쓰러웠는지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매 방학 때마다 할머니 집에 보내셨고, 할머니 집 읍내의 과자 가게에서 과자를 한 보따리씩 사주셨다. 그렇게 일주일 또는 열흘 간 할머니 집에서 생활하다 다시 집으로 가곤 했다.

그 때는 여름이었다. 늘 가지 않았지만 늘 갔던 것처럼 나와 내 동생은 익숙하게 할머니 집에 들어갔고, 곧 그 곳에서 지난 겨울에는 없었던 까만 고양이를 보게 되었다.

고양이의 목은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케이블 타이로 묶여 있었고 폐전선이 케이블 타이와 묶여, 고양이의 이동을 제약하고 있었다. 할머니 입장에선 그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언제 갈지도 모르는 길고양이 또는 도둑고양이를 위해 반듯한 목줄을 산다는 생각은 할머니에겐 불가능했으니까.

나와 내 동생은 고양이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갔다. 고양이는 묶여 있었지만 그나마 활동 반경이 넓은 수준이었고, 근처에는 밥그릇과 물을 떠다놓은 그릇도 보였다.

적적한 할머니 삶에서 최고의 친구라고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은 생명은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줬을 것이라 추측한다.

동생은 달려가 고양이를 만졌고 나는 동생이 만지는 고양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양이. 고양이. 검은 고양이.

그래, 이름이 필요했다. 고양이라 부르기에는 특별함이 없지 않은가?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물음에 동생도 귀를 기울였던 것 같다.

"할머니! 고양이 이름 뭐예요?"

내 질문에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셨다. 분명히 할머니는 내 질문 전까지 아주 당연하게도, 그리고 또 자연스럽게도 해당 생명체에 대한 이름은 전혀 지어주지 않으신 게 분명했다. 소는 소고 닭은 닭이다. 개는 개이고 고양이는 고양이인 삶이셨으니. 여유없이 달려오신 삶에 내 질문은 어쩌면 할머니가 그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삶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었을거다.

할머니는 한참을 고민하시더니 이윽고 말씀하셨다.

"살찐이!"

과연, 고양이는 포동포동했다. 포동포동한 정도가 아니라 뒤룩뒤룩이 어울린다고 해야하나? 동생은 그 소리를 듣더니 박장대소했고 나도 그런 동생을 따라 크게 웃었다.

"할머니. 살이 쪄서 살찐이라고요?"

동생이 되묻자 할머니는 멋쩍게 웃으셨다. 그리고 대답하셨다.

"살찐이니까 살찐이지."

나와 내 동생은 깔깔거리며 웃었고 할머니는 그런 나와 내 동생을 보며 따라 웃으셨다.

그 땐 왜 할머니가 그렇게 웃으시는지 알지 못했다. 나와 내 동생은 통통한 친구들을 돼지라고 놀리며 웃는, 어쩔 수 없는 초등학생 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가 고양이의 뱃살과 뒤룩뒤룩 찐 몸을 보며 놀리는 것이라, 또는 희롱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와 내 동생에겐 그 고양이는 살찐이었다. 살이 쪘으니까.

아마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는 역시 사물이나 동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삶을 살아오지 않으신 게 분명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내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셔서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할머니가 계셨고, 그런 할머니께 인사를 드린다고 찾아갔었다.

지난 추석,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고 나는 불편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그 자리에서 아내의 할머니를 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듣게된 그 그리운 말.

"새로온 사위 빨리 밥 먹이고 저기 살찐이도 밥 좀 줘라."

살찐이. 이십 년도 넘은 지난 날 처음으로 들었던 그 말이 다시금 들렸고 나는 아내의 할머니를 보며 그 여름 날로 돌아갔다. 동생은 웃고 있었고 그런 동생을 보며 나도 웃고, 그런 나와 동생을 보며 할머니도 웃고 있었다.

"새 사위 뭐햐?"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새 사위가 이상하셨는지 아내의 할머니가 말을 하셨고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이어진 추석. 온 가족이 모여 시끄럽게 시간을 보내던 중, 나는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이십여 년 전에는 못 물어봤었던 그 질문.

"근데 고양이가 왜 살찐이에요? 쟤는 말랐는데."

고양이가 옛날에 살이 쪘다가 빠진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 질문을 내뱉고는 나는 아차싶었다. 새 사위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질문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내 질문에 아내의 할머니는 허허 웃으셨다. 그냥 지으신건가? 왜 살찐이일까?

내 의문은 할머니가 아니라 옆에 계신 아내의 이모부로 인해 풀리게 되었다.

"거, 경상도에서는 고양이를 삵진이라 불렀다이가. 그래서 삵진이 삵진이 하다가 살진이가 된거지."

말을 듣는 순간 멍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찔한 순간에 어떻게든 참아내었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할머니가 우리를 보며 멋쩍게 웃던 모습이 생각났다.

나와 내 동생은 그저 고양이의 몸을 보고 이름을 살찐이로 지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당연히 고양이를 어릴 때부터 삵진이라 불렀기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었다.

역시, 우리 할매...고양이를 고냥이 또는 냥이라 이름 짓는 것과 무엇이 다른 거야. 우리 할매 답다. 할매...

그 날, 나와 내 동생과 할머니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었다.
할머니에게는 나와 내 동생에게 살찐이가 아니라 왜 살진이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고, 나와 내 동생은 고양이에게 다른 이름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이 부족했다.

아니, 할머니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어도 그 날 우리에게 왜 살진이인지 설명해주셨을까?

부족함과 부족함이 만나 이루었던, 또는 부족함과 관용과 이해심이 만나 이루었던 그 날의 가장 순수했던 웃음은 아마도 할머니의 적막한 삶에 가장 큰 기쁨으로 다가왔을 것이었다.

"화장실이 급했나보네. 새 사위."

이모부님이 말씀하셨고 나는 솜을 머금은 듯 먹먹한 가슴을 가지고도 밝고 활기차게 대답했다. 오늘은 아내의 할머니가 달력이 빨갛게 칠하며 그토록 기다렸던 자식들과 손주들이 오는 날이었다.

나와 내 동생이 언제 오는지 달력에 크게 표시해놓았던 할머니가 애정으로 키웠던 아이가, 마찬가지로 자식과 손주 오는 날을 크게 표시해놓은 다른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는 날이었다.

"아닙니다. 아, 음식이 정말 맛있네요."

살찐이 때문일까? 나는 마치 돌아가신 할머니의 집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아무렴 어떤가, 이제 아내의 할머니가 내 할머니인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가슴 한 켠에 고이 묻고...다음에 다시 뵐 때까지 살찐이 핑계로 가끔 와야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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