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는 어둑한 카페 창밖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나는 요즘 시대에 인문학이 ‘학문’이라고 불리는 게 참 신기해. 정확히 말하면, 불쾌해. 세상엔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지식이 있는데, 저건 그냥 말의 유희에 불과하거든."
정우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인문학은 인간을 이해하고… 문화와 역사, 윤리적 사고 같은 걸—"
현우는 차갑게 말을 끊었다.
"들어봐. 요즘 인간은 이해할 시간이 없어. 살기 바쁘고, 버텨야 해. 누군가 죽어가고, 누군가는 거리로 나앉고, 누군가는 내일 당장 무너질 회사를 붙들고 있지. 이런 현실 앞에서 ‘존재란 무엇인가’ 따지고, ‘자유의지는 허상인가’ 고민하는 게 무슨 의미야? 현실이란 건 생각으로 바뀌지 않아. 오직 행동과 기술, 해결만이 변화를 만들어."
그는 고개를 젓고, 목소리를 낮췄다.
"학문이라는 건, 궁극적으로 타인을 위한 것이어야 해. 내가 뭘 알고 말고는 부차적인 문제야. 진짜 학문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지식’이야. 의학은 생명을 구하고, 공학은 삶을 편하게 만들고, 과학은 세계를 해석하고 조작할 수 있게 해주지. 그런데 인문학은?"
현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문학은 ‘사람을 이해한다’고 자뻑하지. 근데 웃긴 건, 그 인문학자들이 사람 하나 제대로 설득도 못 해. 현실 속 갈등을 조율하지도 못하고,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한 적도 거의 없어. 사람을 이해한다면서 사람과 동떨어져 있어. 책상 앞에서만 존재해. 이름만 ‘인문’이지, 사실은 ‘자문(自文)’이야. 자기 안에서만 맴도는 글."
그는 하나씩 예시를 들기 시작했다.
"문학? 『변신』이 인간 소외를 그렸다고? 좋아, 그걸 읽고 현실에서 뭐가 바뀌었지? 가족이 갑자기 외면하는 걸 막을 수 있어? 아니야. 그냥 ‘공감’이라는 허울뿐이야. 철학? 니체가 말한 초인, 사르트르의 실존, 플라톤의 이데아… 멋있긴 하지. 근데 그게 빈곤 문제 해결에 무슨 도움을 줬지? 사회불평등, 기후위기, 전쟁… 철학은 언제나 한발 늦었어. 문제 앞에서 아무것도 못 했고, 그냥 해석만 했어."
정우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래도 인문학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만들어준 건 사실이잖아.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기술만 따르지 않게 해주고…"
현우는 코웃음을 쳤다.
"그건 인문학이 한 게 아니라, 현실이 강요한 통찰이야. 기술이 인간을 파괴하니까 그제서야 뒤늦게 의미를 찾은 거지. 인문학이 먼저 나서서 위험을 막은 적 있어? 없어. 늘 사고 터진 다음에 해석만 하지. 마치 화재가 나고 나서 ‘이 집 구조가 위험했군요’라고 말하는 소방관 같아. 이미 다 타버렸는데."
그는 컵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힘주어 말했다.
"진짜 문제는 이거야. 인문학은 자기완결적이야. 누군가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감동받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감탄해. 그 안에 남을 위한 실질적 변화는 없지. 그냥 자기 도취야. 그래서 난 인문학을 지식의 ?라고 불러. 실제론 아무 작용도 없지만, 자극은 넘쳐. 그리고 대부분은 자기만족으로 끝나지."
현우는 한 박자 쉬며 정리하듯 말했다.
"나는 학문이란 말에 조건을 단다.
‘쓸모 있어야 한다.’
‘남에게 닿아야 한다.’
‘현실을 바꿔야 한다.’
이 셋이 없다면, 그건 아무리 멋진 말로 포장해도 학문이 아니야.
인문학은 이 셋 중 단 하나도 충족하지 못해. 그래서 난 단언해.
‘인문학은 학문이 아니다.’
그건 학문의 탈을 쓴 자기 연민이자, 고상한 낭비일 뿐이야."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침묵은, 부정이 아닌 흔들림이었다.